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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목욕탕과 사우나의 역사

공중 목욕의 역사는 놀랍게도 원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20000년경 사람들은 뜨겁게 달군 돌에 물을 끼얹어 사우나를 즐겼다고 해요. 목욕이 몸을 깨끗이 하는 것 외에 건강 증진에도 도움이 된다는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명 사회가 형성되면서 '건강미'가 아름다움의 기본적 조건이 됨에 따라 목욕은 더욱 중요시되었습니다. 




고대의 목욕탕


고대 그리스의 남자들은 가벼운 질병 치료나 피부 미용을 위해 향수를 몸에 뿌리곤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풍습을 따랐으며 1천 6백 명까지 수용 가능한 거대한 대중 목욕탕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건강 증진'으로서의 목욕은 중세 시대에 흔적을 감추고 말았죠.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몸을 다 드러내 놓고 씻는 행위는 유혹을 일으키기 때문에 죄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를 받을 때 물에 몸을 담그는 것 외에는 거의 씻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실내 목욕이 사라지면서 대중목욕탕이 등장했습니다. 이때부터 도시나 농촌에서 공동으로 목욕하는 습관이 일반화됐으며 사람들은 건성으로 씻었습니다. 


건강 증진에 대한 관심 차원에서 목욕이 다시 유행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서였습니다. 그 무렵 유럽 사람들은 건강 유지를 목적으로 소문난 온천 시설을 즐겨 찾았고, 며칠씩 묵으며 하루에도 수 차례씩 물 속에 들어가 요양을 취했다고 하네요. 그렇지만 이런 온천 목욕의 유행은 특정 계층에 한한 혜택이었으며, 서민들은 먹고 사느라 목욕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죠.


19세기 선진국이었던 영국의 경우, 1860년대까지도 가정집에 목욕탕이 설치된 경우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심지어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했을 당시에도 버킹검 궁에는 목욕탕이 없어서, 즉위 후 즉각 목욕탕을 만들 정도였다고 해요. 대중 목욕탕이 있긴 했지만, 학교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대도시로 몰려오고 콜레라 왕국'이라는 별칭이 붙은 빈민촌에 콜레라,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이 창궐하면서부터 대중 목욕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후 대중 목욕탕은 대도시의 인구 증가에 비해 물의 공급이 따르지 못하는 사정도 반영돼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동양의 목욕탕


동양에서는 일본이 대중 목욕탕과 사우나 유행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해양성 기후로 인해 신체의 끈적거림이 목욕 습관을 형성시킨 것이지만, 대중 목욕탕은 근대화 바람을 타고 서양에서 들어왔답니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가장이 저녁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최초로 행하는 일은 입욕이었습니다. 깨끗이 씻고자 하는목적이 가장 크지만 한편으로, 온수를 통해 긴장을 풀어 주는 후로(욕조)는 체내에 열을 축적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일본인들은 '나가시'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나가시란 부엌 근처에 만들어 식기 따위를 씻기도 하는, 목욕통 밖의 몸 씻는 곳을 말합니다. 나가시는 대나무로 마루처럼 짜여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한 창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그 곁에는 뜨거운 물이 가득 든 나무통이나 단지가 놓여 있고, 나무 바가지로 뜨거운 물을 뜨는 식으로 목욕을 합니다. 사용하는 물은 아주 적다고 해요. 


음부를 씻는 '킴무라시'와 배꼽 목욕'과 같은 최소한의 몸단장은 연안 지방과 산악 지대 대부분의 마을에서 볼 수 있는데, 물과 연료가 부족한 탓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주민들은 몸을 씻을 때 몸을 물에 담그기보다 물을 끼얹었다고 하네요. 물을 끼얹는 행위는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위로, 대중 목욕탕의 풍경을 보면 욕객들은 나무 토막으로 만든 물통 하나와 물수건을 각각 소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에서 대중 목욕탕이 유행한 것은 메이지(1867∼1912 재위) 시대의 일입니다. 1867년 고메이 천황의 뒤를 이어 왕위에오른 메이지는 그 자신 서구식 복장과 서양 요리를 즐기면서 점증하는 근대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호응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따라 의식주 전반에 걸쳐 서구화 바람이 불었으며, 현재적 형태의 대중 목욕탕이 성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인 에도에만 6백 군데의 목욕탕이 생겼으니, 그 유행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목욕탕은 불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곳이었으나, 근대화 이후로 서민들을 위한 공중 목욕탕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공중 목욕탕이 생긴 초기에 남자와 여자가 같이 목욕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불을 너무 밝게하지 않고 남자는 허리에 옷을 걸치고 여자는 속옷을 입음으로써 예의 범절을 지켰다고 해요. 비누는 비싼 상품이었으므로 이상하게도 수건을 잘 쓰지 않았고 몸이 축축할 때 옷을 입었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쾌함을 유지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목욕탕 사우나의 시작


우리 나라의 목욕탕은 1900년경 부산에서 온천이 개발되면서부터 생겼다고 합니다. 1924년 평양에 대중 욕탕이처음 설립되었고, 이듬해 서울에도 세워졌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수도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공중 욕탕이 널리 보급되었지만, 사실 공중 목욕탕 문화는 일본인에 의해 유행되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한국에 많이 이주해 오면서 공중 욕탕 문화를 함께 들여온 것입니다. 어찌 됐든 20세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중 목욕 시설이 발달하여 가내 목욕탕을 대신하였으며,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한 사우나가 신분계층을 막론하고 널리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피로하거나 찌뿌둥할 때 목욕을 하면 피로가 싹 풀리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목욕탕을 이용하는 이유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