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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의 왕 요한스트라우스

요한 슈트라우스는 두 사람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처음으로 왈츠를 유행시킨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부)와 그의 아들이자 '왈츠의 왕'으로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자)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부자 때문에 왈츠가 비엔나를 대표하는 음악이 되었고,  왈츠 춤은 유럽 상류 사회의 유행으로 번지게되었습니다. 



                                                                               요한스트라우스(부)


슈트라우스는 1826년 '츠바이 타우벤'(2마리 비둘기)의 정원에서 '비둘기 왈츠'를 연주했는데,  이것은 왈츠의 제목을 초연된 장소에서 따 온 최초의 비엔나 왈츠였습니다.  왈츠 음악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슈트라우스(부)는 1830년 슈페를 댄스 홀에서 지휘하여  왈츠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그는 비엔나 음악계에서 '오스트리아의 나폴레옹'으로 불려질 만큼 존경을 받았고, 그가 유행시킨 왈츠 춤은 교양 있는 사람들의 사교춤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1830년대 초엽 왈츠가 비엔나를 온통 사로잡았을 때 당시 비엔나를 방문했던 독일 음악가 바그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요한 슈트라우스(부)의 놀라운 연주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모든 곡에 뜨거운 정열을 쏟아 넣었고 청중은 황홀경에 빠졌다. 새 왈츠 곡을 연주할 때마다 비엔나 음악의 화신같은 이 사나이는 아폴론 신전 청동 삼각대 위에 서 있는 여신관 피티아처럼 몸을 떨었고, 이 사나이를 찬미하는 도취의 신음 소리는 해일 같은 흥분 상태를 만들어 냈다."


왜 이처럼 왈츠가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요? 왈츠는 바람처럼 자유로이 움직이는 생명력과 감성을 표현하는 표제 음악이며 정서를 묘사하는 음악적 기술입니다. 


명곡으로 일컬어지는 왈츠 곡에는 저마다 독특한 무드가 있습니다. 그리움, 사랑, 기쁨, 슬픔, 안타까움 등 감정의 흔들림을 피부로 느끼게 만들죠. 비엔나왈츠는 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면서도 입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유럽 예술과 문학은 낭만파의 전성기였고, 정열과 달빛으로 상징되는 고즈넉한 황혼미가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했죠. 그런데다 비엔나는 경제적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비엔나는 바야흐로 현실화된 꿈의 도시였고 그 자연 역시 아름다웠습니다. 


왈츠는 이런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폭발적인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왈츠는 '왈츠의 왕'으로 불린 슈트라우스의 아들에 의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고 합니다. 1849년 슈트라우스(부)가 죽자 슈트라우스(자)는 아버지의 악단을 자신의 악단과 통합하고 러시아, 영국을 거치는 순회 공연에 올라 커다란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제 어떤 축하의 자리도 슈트라우스의 음악 없이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게끔 되었습니다. 




                                                                           요한스트라우스 2세


슈트라우스는 400곡이 훨씬 넘는 많은 작품을 작곡했는데, 이중에서 단일곡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입니다. 이 작품의 주제곡은 19세기 음악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선율 중의 하나입니다. 


왈츠는 또한 시대의 시련을 이겨냈다. 1848년 혁명 때 왈츠 춤인기는 잠깐 주춤했지만 곧 되살아났고, 제1차 대전 종전 후인 1925년경에는 미국의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답니다. 


유럽의 교양을 흠모했던 미국인들은 교양적 취향의 상징으로 왈츠를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해요. 오늘날에도 왈츠는 비엔나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 받고 있답니다.